57. 월가의 중압감, 브루클린 브리지, 그리고 고려당 팥빙수의 추억
- Sangwon Jung
- 2024년 7월 4일
- 3분 분량
최종 수정일: 7월 22일

📈 세계 경제의 심장, 월가(Wall Street)의 중압감
리버티 섬에서 나와 다시 맨해튼 시내로 들어서자, 어제저녁 어두컴컴할 때 느꼈던 중압감과는 사뭇 다른 밝고 활기찬 뉴욕의 대낮 풍경이 펼쳐졌다. 습도가 높지 않고 상쾌한 초여름 바람이 불어와 걸어서 둘러보기에 더없이 좋은 날씨였다.
도심 곳곳의 조그만 공원과 벤치에는 점심시간을 맞아 도시락을 먹거나 한가로이 담소를 나누는 양복 차림의 직장인들로 가득해 한없이 평화로워 보였다.
세계 경제의 심장이라 불리는 월가(Wall Street)에 들어섰을 때의 그 묵직하고 거대한 기운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뉴욕 증권거래소(NYSE) 건물 전면에는 대형 성조기가 웅장하게 걸려있었고, 중무장한 경호원들이 건물 주변을 철통같이 감싸고 있어 세계의 돈줄을 쥐락펴락하는 장소 특유의 팽팽한 긴장감과 생동감이 온몸으로 밀려왔다.
🌉 부르튼 발과 차이나타운의 복잡함
월가를 나와 동쪽 브루클린 브리지(Brooklyn Bridge)로 발길을 옮겼다. 하지만 아침 8시부터 나와 줄곧 걸었던 터라 점심도 건너뛴 아이들의 입에서 마침내 앓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나조차도 발바닥이 부르터 통증이 밀려왔으니 어린아이들은 오죽했으랴.
차로 지나치는 건 쉬워도 발로 직접 디뎌야 도시의 숨결을 깊이 있게 담을 수 있다는 사진가의 고집으로 아이들을 다독이며 다리 중간까지 함께 걸어 들어갔다. 고풍스러운 현수교 와이어 사이로 건너다본 맨해튼의 마천루는 아픈 발의 통증을 잠시 잊게 만들 만큼 눈부셨다.
다시 발걸음을 돌려 다다른 차이나타운(Chinatown)은 한인타운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거대한 규모를 자랑했다. 들려오는 소리는 온통 중국어뿐이라 현지 미국인 몇몇을 빼면 영락없는 중국 현지였다. 미국 여느 대도시나 차이나타운의 풍경은 유독 복잡하고 지저분하지만, 그 무질서함 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유별난 생동감만큼은 본능적이었다.
🚌 게임기 할머니와 일방통행 도로의 버스
발끝이 쑤셔와 숙소로 돌아가기 위해 노선버스를 기다렸다. 한참 뒤 다가온 버스의 운전석에는 우람한 체구의 흑인 여성 기사님이 앉아 계셨는데, 미국의 여느 다운타운 도로가 그렇듯 좁고 복잡한 일방통행 도로를 거침없고 쿨하게 내달렸다.
엉겁결에 버스 앞쪽 빈자리에 앉았다가 노약자석 표시를 보고 서둘러 일어섰다. 내 바로 앞자리에 앉으신 연세 지긋한 할머니 한 분은 자리에 앉자마자 주머니에서 전자 오락기를 꺼내들더니 혼신을 다해 게임에 몰입하시는 것이 아닌가! 그 천진난만하고 열정적인 할머니의 모습이 시애틀에서는 보지 못했던 색다른 풍경이라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 팥빙수 한 그릇, 그리고 '시간이 멈춘 빵 맛'의 인문학
버스에서 내려 호텔로 향하는 길, 딸 예지가 눈을 반짝이며 한인타운 입구에 있는 한국 제과점에서 시원한 팥빙수가 먹고 싶다고 떼를 썼다. 아내와 도희는 피곤하다며 먼저 호텔로 들어가고, 예지와 나 둘만의 오붓한 데이트가 시작되었다.
우리가 들어간 곳은 유명한 한인 빵집 '고려당'이었다. 세련된 인테리어와 정겨운 빵 냄새, 테이블을 채운 한인들의 모습은 마치 고국 서울 강남의 쾌적한 카페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달콤하고 시원한 팥빙수와 고국의 빵 맛은 그야말로 일품이었지만, 맨해튼 한복판답게 물가는 소문대로 무시무시하게 짭짤했다.
문득 떠오른 생각 하나. 미국 일반 빵들은 설탕을 씹는 것처럼 무지막지하게 달아서 평소 빵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늘 제대로 된 한국식 빵이 그리웠다. 하지만 정작 우리가 살고 있는 서부 워싱턴주 시애틀 일대의 한국 빵집들은 이상하게도 내가 아주 어릴 적 먹던 뻣뻣하고 투박한 고전적인 빵 맛에서 조금도 나아지질 않아 늘 의아했었다.
훗날 현지 교민들에게 그 연유를 물어보고서야 비로소 무릎을 쳤다.
"이민을 온 사람들은 본국을 떠나온 그 시절에 자신들의 추억과 고국의 이미지가 고정됩니다. 시애틀 지역은 이민 역사가 길어 수십 년 전 들어오신 분들이 많다 보니, 그때 먹던 추억의 빵 맛을 만들어야 팔리지 요즈음 한국 스타일로 현대화하면 오히려 외면받습니다."
모국을 떠나온 시간 속에 미각과 추억을 멈춰둔 채 살아가던 교민들의 아련한 정서가 느껴져 가슴 한구석이 찡해졌다.
(당시 교민들의 고전적인 빵 맛과 고려당의 현대적 빵집이 대조를 이루던 풍경은 세월이 흘러 2026년 현재 완전히 새로워졌다. 파리바게뜨, 뚜레쥐르 같은 한국 대표 프리미엄 제과 브랜드들이 뉴욕 맨해튼 32가 중심가는 물론 미 대륙 주요 도시에 속속 뿌리를 내렸고, K-베이커리의 세련된 맛과 디자인은 현지 미국인들까지 매료시키는 미 동부의 대표 디저트 문화로 당당히 자리 잡았다.)
시간이 멈춘 고국의 옛 맛과, 뉴욕 한복판의 세련된 현대의 맛이 묘하게 교차하던 그 여름날의 해질녘. 딸 예지의 입가에 묻은 팥빙수 단맛을 닦아주며, 한 듬뿍 올려 담은 한국 빵 봉지를 들고 호텔로 돌아오는 여행자의 발걸음은 더없이 배부르고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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