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롤라이플렉스의 노신사, 거대한 자연 동물원
- Sangwon Jung
- 2019년 6월 4일
- 2분 분량
최종 수정일: 7월 21일
📸 비 내리는 길 위에서 만난 기묘한 인연
"다음번 여행부터는 기필코 한 지역에 진득하게 머물며 원하는 빛을 기다리는 사진을 찍으리라."
야속한 날씨를 원망하며 몇 번이고 마음속으로 단단히 다짐을 해보았다. 하지만 낯선 대륙의 끝에서 쉽게 오기 힘든 곳인 데다 첫 방문이었기에, 이번엔 다음을 위한 '답사'라 여기며 날씨에 구애받지 않고 묵묵히 정해진 코스를 돌기로 했다.
사실 그랜드 티턴은 위대한 풍경사진가 앤셀 애덤스(Ansel Adams)의 작품을 보며 오랜 세월 동경하고 벼러왔던 꿈의 출사지였다. 그런 곳에서 비를 맞으며 셔터를 누르고 있자니 아쉬움이 밀려왔지만, 그렇다고 카메라를 접을 수는 없었다.
한참을 몰입해 마음에 드는 프레임을 잡고 있는데, 문득 커다란 미국 고급 차 한 대가 갓길에 멈춰 섰다. 차에서 내린 백발의 노신사가 아들이나 조수쯤 되어 보이는 젊은이가 받쳐주는 우산 속에서 내게 다가왔다. 그는 조용히 내 카메라를 보더니 대뜸 무뚝뚝하면서도 깊이 있는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 쓰는 렌즈는 몇 미립니까?"
내 짧은 답변을 들은 노신사는 우산을 든 사내에게 무어라 한참을 진지하게 이야기하더니, 이내 클래식한 중형 카메라 '롤라이플렉스(Rolleiflex)'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단 한 번, 묵직하고 간결하게 셔터를 누른 뒤 연기처럼 차를 타고 떠나버렸다.
정신없이 촬영하느라 미처 통성명도 하지 못했는데, 그들이 떠난 뒤 묘한 여운과 함께 강한 호기심이 일었다. 범상치 않던 그 눈빛과 몸짓… 혹시 내가 이름만 들으면 알 만한 미국의 숨은 대사진가는 아니었을까? 빗속의 티턴 산맥 아래서 마주친 그 기묘한 노신사의 잔상은 한동안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 다시 돌아온 옐로우스톤, 거대한 자연 동물원
티턴의 루프 도로를 돌아 다시 옐로우스톤의 남쪽 입구로 들어섰다. 당시에는 한 번 입장료를 내면 두 공원을 자유롭게 들랑날랑할 수 있는 통합 요금제였기에 비용 부담은 없었지만, 조수석과 뒷좌석에 앉은 아이들의 원성이 머지않아 터져 나왔다. "아빠, 똑같은 길을 도대체 몇 번이나 왔다 갔다 하는 거야!"
같은 길을 들락거리는 어른들의 동선을 아이들이 이해할 리 만무했다. 하지만 지루해하던 아이들을 단숨에 깨운 것은 길 위에서 조우한 경이로운 야생동물들이었다. 특히 동물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아들 도희는 난리가 났다. 차 안에서 꾸벅꾸벅 졸다가도 "동물이다!" 외치면 눈을 번쩍 뜨며 벌떡 일어났다.
지평선 위로 유유히 걷는 거대한 버팔로부터 사슴, 무스, 하늘을 가르는 펠리컨과 독수리, 그리고 쏜살같은 코요테와 앙증맞은 피카까지… 공원 안내책자에 적힌 그대로, 사방이 철창 없는 거대한 '자연 동물원' 그 자체였다. 아이들의 환호성 덕분에 지루했던 도로 위는 이내 활기찬 웃음소리로 가득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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