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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비 내리는 티턴, 대륙의 길 위에서 배운 여행의 품격

  • 작성자 사진: Sangwon Jung
    Sangwon Jung
  • 2019년 6월 4일
  • 3분 분량

최종 수정일: 7월 21일


⛽ 기름 게이지와 맞바꾼 가슴 졸인 출발

여행 나흘째 아침, 창밖에는 여전히 야속한 가랑비가 내리고 있었다. 어제 늦은 밤까지 원고와 사진을 정리하느라 늦게 잔 탓에 온 가족의 얼굴에 피로가 짙게 내려앉았다. 이 거대한 대륙의 시차와 장거리 운전에 완전히 적응하려면 앞으로도 며칠은 더 씨름해야 할 듯싶다. 하지만 정해진 여정을 소화하기 위해 서둘러 아침을 먹고 옐로우스톤 서쪽 입구로 다시 진입했다. 어제 달린 길을 고스란히 되돌아 내려가야 하는 다소 따분한 동선이지만, 늘 사진으로만 동경하던 그랜드 티턴(Grand Teton)을 마주한다는 설렘이 비 내리는 우울함을 기꺼이 채워주었다.


그런데 공원 안으로 쑥 들어서고 나서야 차의 기름 게이지가 바닥을 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내의 얼굴에 단숨에 걱정이 태산처럼 내려앉았다. 미국 대륙을 자동차로 여행할 때 지켜야 할 불문율 중 하나는 '주유소가 보이면 무조건 기름을 가득 채우는 것'이다. 도시를 벗어나 외곽으로 나가면 서너 시간을 달려도 주유소 표지판 하나 구경하지 못하는 오지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물론 실시간으로 반경 몇 마일 내의 주유소 위치와 가격까지 척척 알려주는 2026년 현재의 스마트폰 내비게이션 환경이라면 겪지 않을 해프닝이다. 하지만 당시 기름 불이 들어온 계기판을 보며 속으로 땀을 쥐었던 기억은 장거리 운전자만이 아는 아찔한 스릴이다. 다행히 얼마 못 가 공원 내 간이 주유소가 나타났고, 안도의 한숨을 쉬며 아내에게 "거봐, 내 말이 맞지?" 하고 애써 호기롭게 웃어 보였다.


"당시 우리 가족은 사방이 통신 음영 지역이라 강제로(?) 서로의 얼굴을 보며 대화를 나눠야 했다. 하지만 위성 인터넷이 대지 위에 전면적으로 뿌려지는 2026년 현재의 미국 횡단자들은, 저 깊은 옐로우스톤의 골짜기 안에서도 실시간으로 한국의 지인들과 영상 통화를 나누며 대자연의 감동을 실시간으로 중계하는 참 스마트한 세상에 살고 있다."


🍱 캐년랜드의 돌풍, 그리고 모래가 반이었던 점심 도시락

기름을 채우고 간단한 간식거리를 사면서 깨달은 또 하나의 사실은, 미국 국립공원 내부는 '준비 없는 여행자에게 굶주림을 선사한다'는 점이다. 요세미티나 옐로우스톤처럼 메머드급 공원은 그나마 사정이 낫지만, 대다수의 미국 국립공원 안에는 식당은커녕 매점조차 없다. 이럴 때면 사방에 파전과 도토리묵 냄새가 진동하는 한국의 정겨운 관광지 풍경이 문득 그리워지기도 한다.


가슴 아픈 기억도 스쳤다. 몇 해 전 유타주의 캐년랜드(Canyonlands) 국립공원을 여행할 때였다. 촬영에 정신이 팔려 점심시간을 훌쩍 넘기자 아이들이 배고프다고 난리를 피웠다. 마땅히 먹일 게 없어 전날 먹다 남은 찬밥이 담긴 밥통을 트렁크에서 꺼냈다. 그런데 밥을 퍼서 아이들에게 건네려던 찰나, 사막의 거센 돌풍이 한바탕 몰아쳤다. 온몸으로 밥통을 감싸 안았지만 하얀 쌀밥 위로 붉은 모래가 새까맣게 앉아버렸다.


하얗게 질린 아이들의 얼굴을 보며 미안함에 가슴이 미어졌는데, 녀석들은 모래를 대충 걷어낸 찬밥에 김치를 얹어 꿀맛이라며 맛나게도 먹어주었다. 아내와 나는 굶으면서 그 모습을 그저 눈물겹게 바라만 보았었다. 그날의 혹독한 교훈 이후, 우리 차 트렁크에는 삶은 달걀이나 빵 같은 비상식량이 항상 고정석을 차지하게 되었다.


🚌 마시고 죽는 휴가 대신, 조용한 충전을 선택하는 사람들

대륙의 길 위에서 줄곧 목격한 그들의 여행 문화는 신선한 문화적 충격이자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부끄럽게도 우리의 오랜 휴가 문화는 대개 '먹고, 마시고, 노는 것'에 치중되어 있다. 찾아간 장소의 자연을 느끼기보다 "내일은 없다"는 듯 밤새 술잔을 기울이다 후유증만 가득 안고 복귀하는 일이 허다하지 않은가.


반면 이들의 여행은 철저한 '휴식과 내면의 충전'이었다. 수많은 인파가 몰리는 국립공원 어디를 가도 거슬리는 소음 하나 없이 고요하고 정갈했다. 자연을 있는 그대로 감상하고, 비지터 센터에 나란히 앉아 자신들의 역사와 문화를 진지하게 보고 듣는다.


특히 여행객의 대다수가 젊은이들이 아닌 은퇴한 노부부라는 점이 무척 인상 깊었다. 젊은 시절 치열하게 일하고, 노년에 연금 제도의 혜택을 누리며 커다란 캠핑카(RV)를 노인이 직접 운전해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유유자적 대륙을 누비는 풍경. 그 여유로움이 참 눈물겹게 부러웠다.


반면 미국의 젊은이들은 편안한 자동차 대신 거친 자전거에 단출한 배낭을 매달고 뜨거운 아스팔트 위에서 페달을 밟으며 자신의 한계를 시험하곤 했다. 땀을 뻘뻘 흘리는 그 청춘들의 용기에 마음속으로 뜨거운 박수를 보내며, 안락함만 쫓아온 내 젊은 날이 조금은 무색해져 깊은 사색에 잠기기도 했다.


🏔️ 구름 뒤로 거대한 왕관을 숨긴 그랜드 티턴

옐로우스톤의 남쪽 입구(South Entrance)를 빠져나와 얼마 달리지 않아 마침내 그랜드 티턴 국립공원의 경계에 들어섰다. 입구 옆에 자리한 멋스러운 비지터 센터에 들러 공원의 공식 지도를 손에 쥐었다.


당시에는 별도의 매표소 없이 옐로우스톤 입장료에 티턴 공원 요금이 포함되어 있어 가뿐하게 통과했다. (하지만 2026년 현재는 두 공원의 요금이 완전히 분리되어 각각 $35불의 차량 입장료를 내야 한다. 물론 해외 여행자인 우리는 앞서 구매한 $250불짜리 외국인 전용 연간 패스 덕분에 아무런 제약 없이 당당하게 통과할 수 있다.)


지도를 펼쳐 들고 남쪽으로 내려갔다가 시계 방향으로 원형을 그리며 돌아 올라오는 25마일(약 2시간 소요) 코스를 잡았다. 그러나 아침부터 심술을 부리던 날씨가 발목을 잡았다. 빗줄기는 굵어졌다 가늘어지기를 반복했고, 낮게 내려앉은 안개와 먹구름이 그랜드 티턴 산맥의 그 장엄한 피사체를 반 이상 삼켜버린 것이다.


이럴 때마다 정해진 일정에 쫓겨 셔터를 눌러야 하는 횡단 사진가의 숙명에 깊은 회의가 밀려온다. 며칠이고 한곳에 진득하게 눌러앉아 자연이 허락하는 최고의 광선을 기다리는 게 사진의 정석이거늘, 한정된 시간 안에 더 많은 것을 눈에 담으려는 여행자의 조바심이 자꾸만 마음을 급하게 몰아세운다. 구름 장막 뒤로 거대한 왕관 같은 만년설을 숨겨버린 티턴의 하늘을 바라보며, 나는 간절한 마음으로 카메라 렌즈의 초점을 맞추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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