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옛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
- Sangwon Jung
- 2019년 4월 20일
- 3분 분량
최종 수정일: 7월 21일
🐻 첫날의 충격이 부른 모텔 사수 작전, 그리고 루스벨트 아치
옐로우스톤 국립공원 경계에 들어서자마자 우리 가족은 촬영보다 숙소부터 잡기로 뜻을 모았다. 첫날 미졸라에서 밤늦도록 방을 구하지 못해 피를 말렸던 충격이 컸던 탓이다. 마음이 든든해야 촬영도 느긋하게 할 수 있는 법이니까.
사실 내게 옐로우스톤은 이번이 두 번째 방문이다. 첫 방문 때는 사방에서 더운 물과 용암이 치솟는 비현실적인 현상들이 다소 이색적이긴 했으나, 어딜 가나 풍경이 비슷비슷해 큰 감동을 받지는 못했었다. 간헐천 주변은 땅이 워낙 뜨거워 나무 데크 다리로 탐방로를 만들어 두었는데, 지난번엔 한여름이라 숨이 턱 막혔던 반면, 이번 6월 말은 날씨가 선선해 오히려 아늑하고 따뜻하게 느껴졌다.
옐로우스톤에서 가장 눈길을 사로잡은 곳은 뜻밖에도 깊은 협곡 사이로 우렁차게 내리꽂히는 '어퍼 폭포(Upper Falls)'와 'lower 폭포(Lower Falls)' 지역이었다. 노란 암벽과 하얀 물줄기의 대비가 사진가의 셔터를 부지런히 움직이게 했다.
공원의 북쪽 입구로 진입한 것은 이번이 처음인데, 입구에 세워진 우리나라 독립문 형상의 거대한 석조 건축물이 무척 장엄했다. 1903년 당시 미 대통령이던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가 휴가차 이곳에 왔다가 옐로우스톤의 경외감에 반해 지시한 건물로, 그의 이름을 따 '루스벨트 아치(Roosevelt Arch)'라 불린다. 아치 상단에 새겨진 "For the benefit and enjoyment of the people(국민의 이익과 즐거움을 위하여)"라는 문구가 가슴에 깊이 와닿았다.
🦬 시속 30마일로 달리는 버팔로와의 눈싸움
숙소를 잡기 위해 서쪽 입구의 마을로 향하는 1시간 반 동안, 아이들은 다소 지루해했다. 특히 아들 도희는 “아빠, 버팔로(미국들소)는 언제 나와?” 하며 연신 창밖을 두리번거렸다. 지난 경험을 바탕으로 "차 앞까지 걸어 나오니 걱정 마라"고 호언장담했건만, 서쪽 마을에 도착할 때까지 털 끝 하나 보이지 않아 아비로서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설상가상으로 서쪽 마을의 모텔들마저 약속이나 한 듯 '빈방 없음' 간판을 걸고 있었다. 이번 여행은 숙소 운이 참 지독하게도 없다. 한참을 헤맨 끝에 눈물이 찔끔 날 만큼 비싼 값을 치르고서야 간신히 방을 얻었다.
안도의 한숨을 쉬며 다시 공원 안으로 들어서자, 거짓말처럼 야생 동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종류별로 예쁜 사슴들이 뛰놀더니, 저 멀리서 그토록 찾아 헤매던 거대한 버팔로가 한 마리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급기야 차 바로 앞까지 육중한 몸을 이끌고 유유히 걸어왔다.
신이 난 도희와 함께 차에서 내려 슬금슬금 다가가 셔터를 누르는데, 도희가 진지한 얼굴로 으름장을 놓는다. “아빠, 버팔로는 화나면 시속 30마일(약 48km)로 달린대요. 우리한테 돌진하면 어쩌려고 그래요?” 안내서의 경고문이 생각나 내심 뜨끔했지만, 아빠의 자존심을 지키려 태연한 척 사진 몇 장을 더 찍고 서둘러 차로 대피했다.
🧳 한국 아줌마의 필수품, 눈치 작전 '아이스박스'
어둑해진 밤, 쌀쌀한 날씨 속에 모텔 방으로 돌아와 지친 몸을 뉘었다. 밥하기 귀찮은 저녁엔 그저 뜨끈한 라면이 최고다. 우리 가족의 자동차 트렁크에는 항상 커다란 아이스박스와 김치, 취사도구가 실려 있다. 촬영 일정을 맞추려면 야영보다는 모텔 투숙이 유리하지만, 매번 양식만 사 먹다간 고작 햄버거로 끼니를 때우기 십상이라 아내가 바득바득 챙겨온 눈물겨운 살림살이다.
이 장기 횡단 여행에서 가장 상전은 다름 아닌 '아이스박스'다. 매일 아침마다 차로, 매일 밤마다 모텔 방으로 나르는 것도 일이지만, 가장 큰 미션은 '얼음 채우기'다. 미국 모텔 복도마다 비치된 아이스 머신에서 커다란 박스 가득 얼음을 퍼 담을 때면, 모텔 주인의 눈치가 보여 가슴이 두근거리곤 한다. 정 눈치가 보일 땐 미국 주유소 그로서리(마트)에서 파는 몇 달러짜리 얼음 봉지를 사서 해결하곤 하지만 말이다.
한국의 지인들은 가끔 "미국 여행 가면 맨날 버터랑 빵만 먹고 어떻게 사느냐"고 묻는다. 물론 23년 전에는 그랬을지 모른다. 재료 하나하나를 날것으로 챙겨 다니며 낯선 모텔 방에서 눈치를 보며 음식을 해 먹어야 했으니 여간 번거로운 게 아니었다.
하지만 2026년 현재의 미국 여행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편리해졌다. 한국 마트에 가면 부대찌개부터 된장찌개, 떡볶이까지 냄비에 붓고 끓이기만 하면 되는 고품질 '밀키트(Meal Kit)' 제품이 넘쳐나기 때문이다. 굳이 아이스박스 터지도록 양념과 부재료를 바리바리 싸 들고 다닐 필요 없이, 밀키트 몇 팩만 쏙 넣어두면 미국 대륙 한복판에서도 10분 만에 완벽한 고향의 맛을 재현할 수 있는 좋은 세상이 되었다. 세월의 흐름이 준 참 고마운 선물이다.
호비록 트렁크를 열 때마다 진동하는 김치 냄새와 매일 얼음을 부어야 하는 아이스박스가 골칫덩이일지라도, 이 소박한 한국의 맛 덕분에 우리 가족이 지치지 않고 대륙을 달릴 수 있는 것이리라. 든든하게 배를 채우고 나니 내일 마주할 '그랜드 티턴 국립공원'의 풍경이 벌써부터 설레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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