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고성·양양 4박 5일 사진 여정 ④] 백섬 해상전망대의 쪽빛 바다와 늦은 오후의 낙산사
청간정 해변을 떠나 북쪽 거진항 방면에 자리한 백섬 해상전망대로 차를 몰았다. 우리나라 최북단인 고성은 통일전망대나 화진포 김일성 별장처럼 굵직한 분단 역사의 흔적을 품은 명소가 유독 많다. 하지만 이번 여정은 빡빡한 답사 대신 풍경과 빛에 오롯이 시선을 맡기기로 했기에 다른 곳들은 다음으로 미뤄두었다.
오랜만에 귀국해 전국을 다니다 보면 각 지자체마다 출렁다리, 스카이워크, 잔도길처럼 너도나도 비슷한 시설물을 쏟아내고 있어 씁쓸한 기시감이 들 때가 잦았다. 그럼에도 이곳 백섬 전망대에 마음이 끌렸던 건, 육지와 작은 바위섬(백섬)을 잇는 자연 친화적인 해상 인도교라는 점 때문이었다.

총길이 137m, 폭 2.5m의 아담한 해상 데크길이다. 해수면에서 4m에서 최고 25m 높이까지 솟아오르는데, 가장 높은 구간 바닥에는 어김없이 투명 강화유리가 깔려 있다. 방문객들은 발밑이 훤히 내려다보여 아찔하다고 감탄하지만, 나이 들며 슬며시 찾아온 고소공포증 탓에 내게는 그리 반가운 스릴은 아니었다.
발밑 대신 눈앞으로 시선을 던지자 180도로 거침없이 열리는 동해의 망망대해가 한눈에 들어왔다. 바다 위를 사뿐히 걸어 들어와 마주하는 쪽빛 파도와 바위에 부서지는 하얀 포말이 가슴을 후련하게 씻어내린다. 바닥 암반과 해초가 훤히 들여다보일 만큼 물이 맑아 스노클링을 즐기려는 이들이 왜 이곳을 즐겨 찾는지 단번에 납득이 갔다.
해안 도로를 따라 알록달록 무지개색으로 칠해진 가드레일이 제주도의 어느 해변을 떠올리게도 했지만, 시원한 해풍을 맞으며 셔터를 누르는 순간만큼은 온전한 해방감 그 자체였다.

바다 조망을 짧게 마치고 이제 첫날 묵을 숙소가 있는 동해시를 향해 다시 남쪽으로 기수를 틀었다. 숙소로 바로 들어가기 전, 예전부터 늘 머릿속을 맴돌던 양양 낙산사(洛山寺)에 들러보기로 했다.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는 관음성지이자 대표 명찰. 2005년 식목일, 대형 산불로 천년고찰이 화마에 휩싸였다는 충격적인 뉴스를 미국에서 전해 듣고 가슴 아파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런데 정작 내 발로 낙산사에 와본 적이 있었던가? 까마득한 젊은 날 와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묘한 기억을 안고 일단 달려갔다.
오후 5시 무렵 낙산사 주차장에 닿았다. 입장 마감 시간을 걱정했으나 다행히 하절기에는 오후 7시까지 입장이 가능해 여유가 있었다. 늦은 오후라 주차장은 한산했고, 서둘러 숲길로 발을 들였다.

완만하게 이어지는 솔숲 데크길을 걷다 보니 낮은 각도로 비쳐 드는 늦은 오후의 태양빛이 눈이 부실 정도로 찬란했다. 길게 드리워진 그림자 덕분에 소나무 둥치의 거친 껍질과 전각들의 처마 선이 한층 입체적이고 깊이 있게 살아났다. 이 낯설면서도 눈부신 빛의 결을 마주하니, 아무래도 낙산사는 이번이 생애 첫 방문인 게 틀림없다는 확신이 들었다.
신라 문무왕 11년(671), 의상대사가 관세음보살의 진신을 친견하고 창건했다는 천년고찰. 산세가 관세음보살이 상주한다는 인도의 보타낙가산(補陀洛伽山)을 닮았다 하여 이름 붙여진 절집이다.
조선 세조의 행차를 기려 세웠다는 석조 홍예문(虹霓門)을 지나 경내로 들어서니, 늦은 시각임에도 참배객과 여행자들의 발길이 제법 이어졌다.

낙산사 경내에서 가장 시선을 붙든 곳은 단연 깎아지른 해안 절벽에 터를 잡은 의상대(義湘臺)였다. 의상대사가 좌선 수행을 하던 유서 깊은 자리로, 1925년에 지금의 정자가 세워졌고 홍련암과 함께 국가지정유산 명승으로 지정된 곳이다. 정자 난간에 기대어 서니 저 멀리 절벽 바위틈에 위태롭고도 단아하게 앉아 있는 홍련암과, 그 아래로 포효하듯 부딪치는 동해의 파도가 어우러져 숨이 멎을 듯한 비경을 연출한다.
홍련암으로 내려가는 길은 다음으로 아껴두고, 절의 가장 높은 언덕 끝자락에 자리한 해수관음상(海水觀音像)으로 향했다.

높이 약 15m, 둘레 3m에 달하는 거대한 화강암 불상은 경내 어디에서나 고개를 들면 보일 정도로 당당하다. 1970년대 조성 당시 동양 최대 규모를 자랑했던 불상이다.
요즘 전국 각지의 사찰들이 경쟁하듯 초대형 불상을 세우는 세태에 마음 한구석 씁쓸한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붉게 물들어가는 저녁 하늘을 배경으로 우뚝 솟은 소나무 한 그루와 자비로운 표정의 관음상을 렌즈에 담고 있자니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는다.
불상 앞 벤치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두 손을 모으고 담소를 나누는 가족과 연인들의 평화로운 표정들. 부모님을 요양원에 모신 뒤 가슴 한구석을 내내 짓누르고 있던 무거운 응어리와 복잡했던 상념들이, 붉게 물든 바다 너머로 부드럽게 흩어져 내리는 듯했다. 오기를 참 잘했다.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 아침부터 고성 능파대, 천학정, 청간정, 백섬을 거쳐 양양 낙산사까지 쉼 없이 달려온 첫날. 특별히 치밀한 계획 없이 떠나온 길이었지만, 빛과 풍경이 이끌어준 첫날의 여정은 더없이 풍성하고 알찼다.
이제 땅거미가 내려앉은 7번 국도를 따라 베이스캠프인 동해시 묵호로 기분 좋게 차를 달린다.












명소 정보:
백섬 해상전망대: 강원 고성군 거진읍 거진리 산105. 입장료 무료. 거진항과 화진포 사이에 위치.
양양 낙산사: 대한불교조계종 제3교구 본사 신흥사의 말사. 2005년 대형 산불 후 원통보전과 전각들을 조선 세조 때의 원형에 가깝게 복원함.
![[강원도 고성 4박 5일 사진 여정 ③] 청간정 해변에서 마주한 동해와 빨간 등대, 하얀 등대의 비밀](https://static.wixstatic.com/media/ca39b6_f74f3d8f561141a2be549f8a18bd4659~mv2.jpg/v1/fill/w_980,h_653,al_c,q_85,usm_0.66_1.00_0.01,enc_avif,quality_auto/ca39b6_f74f3d8f561141a2be549f8a18bd4659~mv2.jpg)
![[강원도 고성 4박 5일 사진 여정 ②] 절벽 위의 숨은 누정 '천학정'과 관동제일경 '청간정'](https://static.wixstatic.com/media/ca39b6_9278459d0b3a4871ad518485e0cddb6a~mv2.jpg/v1/fill/w_980,h_653,al_c,q_85,usm_0.66_1.00_0.01,enc_avif,quality_auto/ca39b6_9278459d0b3a4871ad518485e0cddb6a~mv2.jpg)
![[강원도 고성 4박 5일 사진 여정 ①] 파도를 능멸하는 신비로운 바위, 고성 능파대](https://static.wixstatic.com/media/ca39b6_1753b8156d1d4650b319145df2f0f6e0~mv2.jpg/v1/fill/w_980,h_653,al_c,q_85,usm_0.66_1.00_0.01,enc_avif,quality_auto/ca39b6_1753b8156d1d4650b319145df2f0f6e0~mv2.jpg)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