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4박 5일 사진 여정 ⑦] 삶의 애환이 꽃으로 피어난 바닷가 언덕길, 동해 묵호등대와 논골담길
정동진의 푸른 파도를 뒤로하고, 이번 여행의 베이스캠프가 있는 동해시 묵호로 차를 몰아 묵호등대로 향했다.
사실 묵호등대는 애초 일정에 깊이 염두에 두었던 곳은 아니었다. 그저 숙소 근처 가볼 만한 곳을 검색하다 보니 가장 많은 추천과 사진이 쏟아져 나와 자연스럽게 발길이 끌렸을 뿐이다.
미국에서 해안가에 살던 시절, 워낙 수많은 등대를 마주하며 사진을 담아왔다. 저마다 뚜렷한 개성과 독특한 조형미를 뽐내는 미국의 등대들은 사진가의 렌즈를 끊임없이 유혹하곤 했다.
반면 한국에 돌아와 마주한 방파제 등대들은 대개 비슷한 모양새여서 그저 무덤덤하게 스쳐 지나치기 일쑤였다. 그런데 인터넷 검색 화면 너머로 마주한 묵호등대는 생김새부터 사뭇 달랐고, 탁 트인 높은 언덕배기에서 바다를 굽어보고 있는 입지부터 시선을 잡아끌었다. 게다가 등대 아래로 '논골담길'이라는 정겨운 골목이 미로처럼 얽혀 있다니 들러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사전 정보로만 보았을 땐 그저 전국 어디에나 흔한 알록달록한 벽화마을 중 하나겠거니 지레짐작했다. 그래도 젊은 여행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명소라기에 가벼운 마음으로 언덕을 올랐다.
하지만 역시 여행길에선 변수가 따르는 법, 하필 '가는 날이 장날'이었다. 마침 휴무일이라 등대 출입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등대 내부나 바로 앞마당까지 들어서지는 못했지만, 워낙 고지대에 자리 잡은 덕분에 묵호항 일대와 동해 바다가 시원스레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조망만큼은 가히 일품이었다.
등대 자체는 다음 기회로 미루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논골담길의 비탈진 골목길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묵호항은 과거 석탄과 시멘트를 실어 나르고, 동해안의 오징어와 명태잡이 배들이 쉴 새 없이 드나들며 '지나가는 개도 만 원짜리를 물고 다닌다' 할 정도로 번성했던 항구였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어획량 감소와 산업 변화로 사람들이 하나둘 떠나며 점차 잊혀가는 쇠락한 달동네가 되었다. 그러다 2010년, 마을의 굴곡진 세월과 사람 냄새 나는 이야기를 담벼락에 그려 넣는 '논골담길 프로젝트'가 시작되며 다시금 활기를 되찾았다.
'논골'이라는 이름에는 코끝 찡한 옛 주민들의 땀방울이 배어 있다.
묵호항에서 갓 잡아 올린 명태와 오징어를 지게에 한가득 짊어지고 언덕 위 덕장으로 오르내리던 시절, 지게에서 뚝뚝 떨어지는 바닷물과 흙탕물이 뒤섞여 골목길이 늘 질척거리는 논바닥 같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란다.
얼마나 길이 험하고 질척였으면 그 시절 이 마을 사람들은 "마누라, 남편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 산다"고 했을까.

논골담길이 흔한 벽화마을들과 다른 지점은 바로 이 서사에 있다. 외지 작가들이 유행 따라 그린 예쁜 그림이 아니라, 1941년 묵호항 개항 이래 거친 뱃일과 허드렛일을 버텨내며 언덕배기에 보금자리를 일군 마을 어르신들의 실제 삶과 애환을 주민들이 직접 붓을 들어 그려냈기 때문이다.
논골1길, 논골2길, 논골3길, 그리고 등대오름길로 거미줄처럼 이어진 골목들은 저마다의 궤적으로 굽이치지만, 어느 길을 택해 걸어도 결국 꼭대기의 묵호등대에서 하나로 만난다.
슬레이트 지붕과 낡은 시멘트 담벼락 사이를 오르내리며 마주하는 그림 하나, 문구 한 줄마다 치열했던 삶의 온기가 진하게 묻어난다. 골목 모퉁이마다 아담한 카페와 소박한 갤러리들이 소담하게 자리해 가쁜 숨을 고르며 쉬어가기에도 참 좋다.

나이 지긋한 우리 세대에게 이런 바닷가 달동네의 골목 풍경은 단순한 구경거리를 넘어, 가난했지만 따뜻했던 옛 시절의 아련한 추억 속으로 빠져들게 만드는 묘한 포근함을 건넨다.
등대 문턱을 넘지 못한 아쉬움 따위는 금세 잊힐 만큼, 이곳에 오기를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치열했던 삶의 무게를 예술로 보듬어 안은 골목길에서 따스한 위안을 마음에 품고, 노을빛이 내려앉기 시작한 언덕을 천천히 걸어 내려왔다.
💡 묵호등대 & 논골담길
묵호등대: 강원 동해시 해맞이길 289. 매주 월요일 또는 시설 점검일에 내부 개방이 제한될 수 있으니 출입 일정을 확인하는 것이 좋습니다.
논골담길: 논골1길(묵호의 과거와 현재), 논골2길(삶의 기억), 논골3길(어르신들의 일상과 희망), 등대오름길(바다 풍경과 조형물) 등 4개의 테마 코스로 나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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