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닌 동상과 오로라 브리지 밑 트롤: 시애틀 속 이색 예술 공화국을 걷다
- sajintour
- 2017년 5월 4일
- 3분 분량
최종 수정일: 5시간 전
워싱턴주를 누구보다 잘 안다고 자부하던 나였다. 그런데 오늘 찾아간 이곳은 마치 처음 와본 듯 참으로 이색적인 인상으로 다가왔다. 솔직히 완전히 처음은 아니다. 오래전 일 때문에 지나친 적도 있고, 차를 타고 무심히 스쳐 지나간 적도 있다. 그러나 그동안 관심 깊게 둘러보지 않고 스쳐 지나쳤던 장소였다.
그러다 5월 어느 날, 다운타운에 사진 재료를 구할 일이 있어 딸아이와 함께 외출을 나섰다. 날씨도 제법 화창했다. 아주 눈부시게 화창한 날까지는 아니었지만, 나들이를 즐기기엔 더없이 기분 좋은 날이었다. 그동안 늘 관심 밖에 머물러 있던 이곳이, 그날따라 눈길을 온통 사로잡았다.
정갈하게 정돈된 호수 공원, 처음 마주한 듯 신선한 역사산업박물관(MOHAI), 그리고 여유로이 산책을 즐기는 시민들의 모습까지 모든 풍경이 참으로 정겹고 아름답게 보였다. '아, 시애틀에 이런 공간이 숨어있었구나!' 하고 감탄사가 절로 흘러나올 정도였다.
그 길 위에서 깨달음을 얻는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삶의 단편만 보고 쉽게 판단하지 말자고 다짐해 본다.
유니언 호수(Lake Union)는 늘 반대편 가스 웍스 공원(Gas Works Park)에서만 내다보았을 뿐, 이쪽 남쪽 연안에서 건너다볼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었다.
알고 보니 나의 여행길은 일종의 '여행 편식'이었던 셈이다. 늘 가보았던 곳, 익숙한 길만 찾다 보니 새로운 장소가 건네는 매력을 너무 멀리해 온 것은 아닌지 스스로를 돌이켜보게 된다.
오늘의 최종 목적지는 프레몬트(Fremont)다. 프레몬트 역시 몇 번 들러본 적은 있지만, 그때마다 길을 잘못 들어 헤매기 일쑤였다. 게다가 매번 가스 웍스 공원을 거쳐 들어가곤 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내비게이션의 도움을 받아 깔끔하게 찾아가 보기로 했다.
사진 재료를 구한 뒤 내비게이션을 켜니 친절하게 길을 안내하기 시작한다. 동행한 딸아이가 옆에서 "아빠는 예전에 내비게이션도 없이 어떻게 길을 찾아다녔어?"라며 신기해한다. 내가 생각해도 허허 웃음이 난다. 종이지도를 펼쳐 들고 찾아다니던 시절이 불과 얼마 전 같은데, 이제는 내비게이션 없이는 어디도 갈 엄두를 내지 못하니 참으로 재미있고 묘한 세상이다.
다운타운을 빠져나와 안내하는 길을 따라가다 보니, 오른쪽 차창 밖으로 넓게 펼쳐진 호수와 깨끗한 공원이 눈에 들어왔다. 처음 마주하는 듯 신선한 풍경에 나도 모르게 차를 주차장으로 돌렸다.
차를 세우고 호숫가 공원 쪽으로 걸어갔다. 호수 건너 저 멀리 익숙한 가스 웍스 공원의 전경이 건너다보였다. 호수 한편은 수중비행기 격납고인 듯했다. 몇 대의 수중비행기가 수면에 떠 있었고, 한두 대는 힘차게 이륙을 준비하고 있었다.
호수 가장자리에는 어여쁜 다리가 놓여 있었고, 다리를 건너자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는 근사한 건물이 서 있었다. 건물 정면으로 '역사산업박물관(MOHAI)'이라는 이름이 또렷하게 들어왔다. 입장료를 살피니 14달러였다. 가볍게 들르기엔 다소 부담스러운 금액이라 내부 관람은 다음을 기약하며 아쉽게 발길을 돌렸다.
공원 주변의 아늑한 자연과 시애틀 다운타운의 현대적인 빌딩 숲이 환상적인 조화를 이루는 도심 속 휴식처였다. 여기저기 거위(Goose)들의 배설물이 수북하게 패어 있어 다소 눈살이 찌푸려지기도 했지만, 공원 전체의 차분하고 온화한 분위기는 참으로 일품이었다.
시애틀 다운타운에서 북쪽으로 조금 올라가 유니언 호수를 건너면 '프레몬트(Fremont)'라는 독특한 동네가 나타난다.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무척이나 유명한 명소다. 이곳을 혹자들은 '예술가들의 공화국' 또는 '프레몬트 인민공화국'이라 부르기도 한단다. 간혹 차로 지나쳐본 적은 있지만 깊이 있게 둘러보지는 않았던 터라, 같은 시애틀 구역이면서도 나에게는 사뭇 이색적이고 낯선 동네였다.
나의 무심함과는 상관없이, 이곳에서는 매년 다채롭고 파격적인 행사들이 열리고 있었다.
가장 대표적인 이벤트가 바로 '프레몬트 축제(Fremont Solstice Parade)'다. 정확하게는 매년 6월 여름에 개최된다. 일반적인 가장행렬 축제 같아 보이지만, 동양인인 우리 시선에는 사뭇 파격적이다. 온몸에 전신 바디페인팅을 한 올 누드 참가자들이 자전거를 타거나 걸으며 축제를 즐기는 이색적이고 자유분방한 행사가 펼쳐진다.
동네 분위기가 확실히 독특하고 자유롭다. 미국이라는 나라가 늘 그렇듯, 억지로 인공을 가하기보다는 자연스러운 멋을 그대로 살려낸 공간이다. 다소 어설퍼 보일지라도 저마다의 명확한 개성과 색깔을 품은 상가와 건물들이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이 동네의 가장 대표적인 표지판은 단연 'The Center of the Universe(우주의 중심)'라는 팻말이다. 왜 이곳을 감히 우주의 중심이라 칭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 팻말이 프레몬트 구석구석에 위치한 설치 미술품과 주요 명소의 위치를 정겹게 일러주는 지이표 역할을 해주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또 하나 유명한 볼거리는 바로 '레닌 동상(Statue of Lenin)'이다. 대표적인 민주주의 국가인 미국의 한복판에 공산주의의 상징인 레닌 동상이 우뚝 서 있다는 사실 자체가 무척 이색적이다.
이 동상은 실제로 과거 동구권에 세워졌던 진짜 동상이다. 제작 기간만 무려 10년이 걸렸으며, 1988년 슬로바키아의 포프라드(Poprad)라는 도시에 최초로 세워졌다고 한다. 그러나 불과 1년 뒤인 1989년 체코 슬로바키아 혁명이 일어나면서 동상이 넘어지고 말았다. 당시 현지에 머물던 미국인 루이스 카펜터(Lewis Carpenter)가 이 버려진 레닌 동상을 구입해 미국으로 운반해 왔고, 임시로 지금의 프레몬트 거리에 세워두게 된 것이라 한다.
내가 방문했을 때에는 누군가 붉은 페인트로 '살인(Murder)'이라는 글씨를 새겨놓고, 동상의 왼손을 붉게 물들여 놓아 다소 서늘하고 강렬한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었다.
마지막 볼거리는 바로 '프레몬트 로켓(Fremont Rocket)'이다. 들리는 이야기로는 '우주의 중심'이라 선언해 두고 정작 그에 걸맞은 상징물이 없어 궁여지책으로 1991년에 옮겨다 놓은 것이 바로 이 로켓이라 한다.
다소 엉뚱하고 억지스러운 면도 없지 않지만, 동네 고유의 위트와 특색을 살리기 위해 애쓴 주민들의 기발한 노력이 구석구석 느껴지는 정겨운 동네다.
그리고 프레몬트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명물은 단연 '트롤(Fremont Troll)' 조각상이다. 트롤은 스칸디나비아 전설에 등장하는 괴물로, 햇빛을 싫어해 어두운 곳에 숨어 살며 어린아이나 젊은 여인을 낚아채 간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그 트롤이 오로라 브리지(Aurora Bridge) 교각 밑에 웅크리고 있다. 원래 이 다리 밑은 어둡고 음침하여 범죄자들이 자주 모여들던 우범 지대였다고 한다. 이를 개선하고자 프레몬트 예술위원회가 아이디어를 모았고, 다리 밑이라는 어두운 공간 특성을 활용해 스칸디나비아 전설 속 트롤 동상을 설치하게 되었다. 이 트롤이 조성된 이후 실제로 우범 지역이 정화되는 효과를 거두었고, 현재는 수많은 세계 여행객이 찾아오는 프레몬트 최고의 명소로 자리 잡았다.
아울러 이곳은 일요일마다 열리는 주말 장터(Fremont Sunday Market)로도 유명하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매주 일요일이면 소박한 장이 들어선다. 주로 손수 만든 수공예품이나 오랜 세월을 품은 골동품들이 거래된다. 프레몬트는 시애틀 여정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매력적인 보물 같은 공간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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