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거친 파도와 기암괴석, 석양 아래 반짝이는 보석 해안: 올림픽 국립공원 루비 비치

sajintour
2016년 9월 17일
3분 분량

최종 수정일: 8월 9일

올림픽 국립공원 내에 있는 해안 중 규모 면에서는 가장 작은 바닷가가 있다. 그러나 내용 면에서는 절대 뒤지지 않는 알찬 곳이다. 그동안 다른 목적지를 향해 가며 자주 지나쳤지만 선뜻 들어가 보지는 않았던 길이었다. 워낙 각양각색의 해안이 많은 지역이다 보니 나도 모르게 무심해졌던 모양이다.


101 번 도로를 따라 올라가다 올림픽 국립공원 입구를 알리는 표지판이 나오면서부터 도로 옆으로 시원한 해안선이 펼쳐진다. 뻥 뚫린 해안도로는 아니지만, 숲 사이사이 언뜻언뜻 모습을 드러내는 바다 풍경이 제법 감칠맛을 더해준다. 그중에는 제법 길게 이어진 해안도 눈에 들어온다. 막힘없이 거침없는 태평양의 당당한 모습이다.


내가 사는 지역은 퓨젯 사운드(Puget Sound) 연안이다. 바닷가 동네에 살면서도 정작 바다인 줄 잊고 지낼 때가 많다. 바닷가로 나가보아도 그저 잔잔한 강가에 온 듯한 풍경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그저 문득문득 하늘을 날아다니는 갈매기를 보며 '아, 여기가 바닷가였지' 하고 뒤늦게 깨닫곤 한다. 그런 평온한 바다만 보다가 탁 트인 수평선의 거친 바다를 마주하면 머리가 맑아지고 가슴속까지 시원하게 뚫리는 기분이 든다.


타코마에서 루비 비치까지는 약 2 시간 30 분, 넉넉잡아 3 시간 가까이 걸리는 다소 먼 길이다. 그나저나 늘 이곳을 지나치면서 유독 이 해안에만 보석 이름이 붙여진 이유가 궁금했다. 인근 바닷가들의 이름은 '라 푸시(La Push)'의 퍼스트, 세컨드, 서드 비치라거나, 올라가는 길에 만난 비치 1, 2, 3, 4처럼 단순한 숫자로 구별해 놓은 곳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유독 이곳만큼은 '루비(Ruby)'라는 화려한 보석 이름을 달고 있었다.


뭔가 대단한 보물이라도 숨겨져 있는 걸까.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이름의 유래를 찾을 수 있을 만한 단서를 찾아 구석구석 둘러보았지만 전혀 찾을 수 없었다. 화려한 이름과는 어울리지 않게 주차장 곳곳에는 물웅덩이가 깊게 패어 있어 승용차로 들어오는 방문객들에게는 다소 불편해 보이는 환경이었다. 주차장 주변에서 힌트를 얻지 못했으니 바닷가로 내려가면 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안고 발걸음을 옮겼다.


완만한 경사로를 따라 내려간다. 코스가 그리 길지 않아 보인다. 이 지역 해안가로 연결되는 탐방로들은 대부분 길고 험한 편인데, 그에 비하면 참으로 짧고 편안한 길이다. 5 분도 채 걸리지 않아 마침내 바닷가에 다다랐다.


해안 초입에 들어서니 어김없이 거대한 쓰러진 나무(Driftwood)들이 길을 가로막고 서 있다. 워싱턴주 바다만의 독특한 상징이다. 한국 같았으면 방문객들이 다니기 편하도록 나무들을 깔끔하게 치우고 길을 냈을 텐데, 이곳 사람들은 자연 그대로의 상태로 무심히 놓아둔다. 자연을 다루는 이들의 이런 태도가 도리어 옳다는 생각이 든다.


처음 마주한 바다 풍경은 기대를 너무 크게 했던 탓인지 썩 마음에 와닿지 않았다. 유난히 하얀 거품이 무성하게 일어나는 파도도 어딘가 지저분해 보이는 느낌이 강했다. 춥고 궂은 날씨였지만 해변에는 제법 많은 사람이 거닐고 있었다. 대부분 가족 단위로 나들이를 나온 모습이었다. 간혹 오붓하게 거니는 연인들도 보였는데, 늘 느끼는 것이지만 이들의 여행은 참으로 조용하고 한가로우며 평화로워 보인다.


잠시 잊고 있었던 '루비 비치'라는 이름의 유래를 다시 떠올려보았다. 하지만 해변 아래로 내려와 둘러보아도 루비라는 이름을 붙일 만한 뚜렷한 근거를 찾지 못했다. 내 스스로가 루비에 대해 '보석의 일종'이라는 사실 외에는 아는 바가 없으니, 이름에 담긴 유래를 직관적으로 밝혀내기가 쉽지 않음을 깨달았다. 일단 이름에 대한 궁금증은 잠시 내려놓기로 했다.


부담감을 훌훌 털어내고 바다를 차분하게 관찰하기 시작했다. 워싱턴주의 여느 해변과 다른 점이 무엇인지 찬찬히 살펴보았다. 다른 해안들과 달리 크고 작은 바위들이 유난히 많이 포진해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웅장한 기암괴석이라 부르기엔 조금 아쉬웠지만, 바닷가 여기저기에 저마다의 형상을 한 바위 해식 기둥들이 우뚝 서 있었다. 라 푸시의 세컨드 비치보다도 이런 바위들이 훨씬 밀도 있게 배치되어 있었다. 해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거닐며 시원하게 밀려드는 파도와 차갑지만 상쾌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구석구석을 프레임에 담아보았다.


파도가 밀려왔다 밀려나가는 밀물의 궤적에 흠뻑 빠져 넋을 놓고 셔터를 누르던 중, 느닷없이 장대비가 쏟아졌다. 피할 곳도 마땅치 않아 일단 카메라를 몸으로 감싸 안고 숨을 죽인 채 잠시 기다리니 다행히 빗줄기가 가늘어졌다. 원하는 구도를 담아낸 뒤 오른쪽 해변 안쪽으로 더 들어가 보려 했으나 발길을 돌려야 했다. 좁게 흐르는 개울물이 생각보다 깊고 거세게 흘러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징검다리조차 없어 건너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무슨 일이든 도중에 멈추게 되면 아쉬움이 크게 남기 마련이다. 건너가지 못하니 저 너머에 훨씬 멋진 사진 피사체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은 진한 아쉬움이 밀려왔다. 어쩌면 그곳에 루비 비치의 비밀이 숨겨져 있을 지도 모를 일이다.^^ 나중에 낚시장화라도 단단히 챙겨 쓰고 와서 건너가 봐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여유를 두고 찬찬히 거닐다 보니 루비 비치가 볼수록 매력적인 장소라는 생각이 들었다. 첫인상은 조금 밋밋했으나 머물면 머물수록 특유의 아늑함과 정감이 깊어지는 곳이다. 이곳저곳을 둘러보는 사이 어느덧 시간이 한참 흘렀다. 날씨가 더 좋아질 것 같지는 않았고, 그나마 비가 더 쏟아지지 않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오늘의 촬영을 마무리하기로 했다. 주차장으로 올라와 장비를 정돈하고 집으로 향했다. 돌아가는 길 너머로 하늘이 거짓말처럼 맑게 개어 있었다.


그리고 몇 달 뒤, 다른 지역을 다녀오던 길에 석양이 무척 예뻐 문득 루비 비치를 다시 찾았다. 그리고 그날, 나는 마침내 이 바닷가의 이름이 왜 '루비'인지 눈으로 똑똑히 확인할 수 있었다. 해 질 녘 수평선 너머로 노을이 질 때, 바닷가 전체가 마치 거대한 루비 보석처럼 붉고 화려하게 반짝이고 있었던 것이다.


루비라는 보석의 색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 잘 몰랐으나, 차후에 들어보니 붉은색부터 밝은 적색, 어두운 갈색, 보랏빛에 이르기까지 스펙트럼이 무척 다양하다고 한다. 석양이 내리는 시간대의 루비 비치 색깔 역시 일몰의 변화에 따라 시시각각 온 세상의 붉은빛을 번갈아 가며 뿜어내고 있었다. 그야말로 진짜 '루비'였다. 보석을 품은 해안이 바로 루비 비치였던 것이다. 몇 달 동안 가슴 한구석에 남아있던 의문이 한순간에 시원하게 풀리는 순간이었다.


비밀을 알고 나니 해변의 풍경이 이전보다 훨씬 더 눈부시고 아름답게 다가왔다. 참으로 신비롭고 매력적인 바다다.


댓글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