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최서북단 절벽 아래, 별빛과 어우러진 거친 갯바위: 올림픽 국립공원 쉬쉬 비치
- sajintour
- 2016년 9월 9일
- 6분 분량
최종 수정일: 1일 전
'쉬쉬 비치(Shi Shi Beach)'는 올림픽 국립공원에 속해 있지만, 지형적인 접근성의 어려움 때문에 많은 사람이 쉽게 찾지 못하는 오지와도 같은 곳이다. 이곳을 처음 알게 된 것은 10여 년 전이었다. 사진 모임의 첫 야영 모임이 있어 미국 최서북단인 '니아 베이(Neah Bay)'로 떠나기로 했다. 낚시를 즐기는 분들은 자주 들르는 곳이지만, 워낙 거리가 멀어 당일치기로는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하는 장소다. 그래서 1박 2 일 일정으로 길을 나섰다. 첫날, 그 지역을 잘 아는 회원 한 분이 저녁을 먹고 쉬쉬 비치로 가보자고 제안했다. 노을 풍경이 워낙 뛰어나 내로라하는 사진가들이 특히 선호하는 장소라고 했다.
저녁을 먹고 여유 있게 출발했다. '풍경이 아주 좋다'는 말 외에는 별다른 지리 정보 없이 입구에 다다랐다. 주차장 주변에 0.6 mile 이라는 표지판이 보였다. 거리도 짧아 왕복하는 데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을 것 같아 가벼운 마음으로 숲속으로 들어섰다. 느지막이 출발했던 터라 숲길은 이내 어둑어둑해졌다. 그런데 0.6 mile 이라는 길은 가도 가도 끝이 없었다. 게다가 길은 진흙탕으로 질퍽거려 걷기가 무척 힘들고 까다로웠다.
어느새 숲길은 까맣게 어두워졌다. 금방 다녀올 길인 줄 알고 아무런 조명 장비도 없이 나섰던 우리는 더 어두워져 불상사가 생기기 전에 나가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을 내리고, 아쉬운 마음을 안고 발길을 돌려 나왔다.
그리고 6 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수차례 '꼭 다시 가봐야지' 마음만 먹었을 뿐 좀처럼 엄두를 내지 못했다. 니아 베이까지 가는 길도 워낙 먼 데다, 나중에 알고 보니 주차장 입구에서 해안가까지는 2 mile이 넘는 험한 숲길을 걸어 들어가야 하는 만만치 않은 코스였기 때문이다. 처음 우리가 보았던 0.6 mile 표지판은 다른 안내 표지였는데, 당시 회원 모두가 쉬쉬 비치로 연결되는 거리로 잘못 알아보았던 것이었다.
그 특별한 장소를 이번에 사진 모임 회원들과 다시 찾아가기로 했다. 정말 큰 마음을 먹고 내린 결정이었다. 워낙 험난한 코스로 소문난 탓인지 참가한 회원은 그리 많지 않았다. 니아 베이는 마카(Makah) 인디언 보호구역 안에 위치해 있다. 우리가 사는 타코마(Tacoma)에서 그곳까지는 약180 mile, 차로 4 시간 30 분 가까이 걸리는 참으로 먼 길이다.
아직은 해가 짧은 시기라 조금 서둘러 출발하기로 했다. 아침 7 시 타코마에서 회원들과 모여 출발했다. 포트 엔젤레스(Port Angeles)에서 페리를 타고 건너온 북쪽 지역 회원분들과도 합류했다. 2 월 날씨답지 않게 화창하고 맑은 날이었다. 올림픽 산맥(Olympic Mountains)의 웅장한 봉우리들이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보였다. 올림픽산이 이렇게 선명하게 드러나는 날이 드물어, 온 김에 '허리케인 릿지(Hurricane Ridge)'에 먼저 올라가 보기로 했다. 하지만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도로 결빙으로 노면 상태가 나빠 길을 통제하고 있었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한 채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애초의 목적지는 여기가 아니었기에 아쉬움을 다독이며 원래 코스로 향했다.
101 번 도로를 타고 서쪽으로 달리다 113 번 도로로 갈아타고 계속 북쪽으로 올라갔다. 이어 112 번 도로를 만나 다시 서쪽으로 계속 나아가니 마침내 니아 베이가 나타났다. 마을 입구부터 인디언 부족 특유의 분위기가 곳곳에서 물씬 풍겨왔다. 커다란 인디언 목장승(Totem Pole)과 독특한 문양들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니아 베이를 빠져나와 해안 쪽으로 조금 더 나아가니 탁 트인 바다가 나타났다. 바로 '마카 베이(Makah Bay)'다. 여름철이면 수많은 야영객으로 북적이는 곳이지만, 아직 날씨가 쌀쌀해서인지 캠핑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캠핑장을 지나 조금 더 내려가니 해안선이 바로 눈앞에 펼쳐졌다. 날씨가 워낙 화창해서인지 바람조차 잔잔했다. 오랜만에 고요하고 평온한 바다를 마주했다. 아침 7 시에 출발한 여정이었는데 어느덧 시계는 12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회원들과 함께 준비해 온 식사를 나눈 뒤 다시 채비를 마쳤다. 일반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구글 지도상에는 'Shi Shi Beach Road'라는 도로가 나와 있었다. 그 길로만 진입할 수 있다면 해안까지 한결 수월하게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현장에 도착해 보니 길은 굳게 막혀 있었다. 도로 표지판조차 없는 좁고 거친 비포장도로였다. 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법한 오솔길이었지만 막혀 있었기에 별수 없이 원래 계획대로 걸어 들어가기로 했다.
조금 더 내려가니 작은 주차장이 나타났다. 바로 쉬쉬 비치 트레일 입구였다. 6 년 전 보았던 그 '0.6 mile' 안내판도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지난날의 착오가 떠올라 절로 웃음이 나왔다.
이번에는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왔다. 신발 끈을 단단히 묶고 심호흡을 한 뒤 발걸음을 옮겼다. 초입의 산책로는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질척이지 않는 단단한 흙길이 아늑하게 이어졌다. 길 상태가 안 좋은 구간에는 나무 데크 다리를 놓아 편안하게 걸을 수 있었다. 가파른 오르막도, 내리막도 없는 순탄한 길이었다. 이 정도 길이라면 10 mile이든 그 이상이든 기분 좋게 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절로 마음이 가벼워졌다. 숲길 사이사이로 이름 모를 야생화들이 반갑게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었다.
울창한 나무 사이로 스며드는 따스한 햇살이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그러나 그런 행복도 잠시, 조금 더 깊이 들어가자 길의 상태가 돌연 변하기 시작했다. 곳곳에 웅덩이가 패고 물이 수북이 고여 있었다. 조금 전 지나온 편안한 오솔길과는 완연히 다른 악로(惡路)였다. 진흙탕과 고인 물을 요리조리 피해 가느라 이동 시간이 예상보다 훨씬 지체되었다. 어떤 구간은 도저히 발을 디딜 곳조차 없었다.(길이 엉망이었던 구간은 사유지라 그렇다고 나중에 알았다) 그렇다고 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니, 그저 신발이 푹푹 빠지는 것을 감수하며 묵묵히 걸어갈 수밖에 없었다. 드물게 마주치는 반대편 마주 오는 방문객들에게 길 상황을 물으니, 하나같이 "해안가 풍경은 정말 최고"라며 엄지를 세워 보였다. 그 말 한마디에 희망을 품고 다시 진흙밭을 헤치며 걸음을 옮겼다.
생각보다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마침내 시원한 파도 소리가 귓가에 가깝게 들려왔다. 안도의 한숨이 절로 흘러나왔다. 바다가 건너다보이는 언덕 위로 나아서자, 그야말로 장관이 펼쳐졌다. 지금까지 둘러보았던 워싱턴주의 여느 해변과는 분위기 자체가 완전히 달랐다. 푹푹 빠지는 진흙길을 고생하며 걸어온 수고가 한순간에 싹 씻겨 내려가는 듯했다. 서둘러 바닷가로 내려가고 싶어 발걸음을 재촉했다.
해안 입구에 다다르니 안내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이곳부터 공식적인 올림픽 국립공원 구역임을 알리는 표지판이었다. 지금까지 지나온 숲길은 국립공원 외곽 지역이라 제대로 된 개발이나 관리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런데 더욱 난감한 것은, 국립공원 입구 표지판은 세워져 있는데 정작 바닷가로 내려가는 탐방로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깎아지른 절벽 같은 경사면이 우리 앞을 막아서고 있었다. 입구를 잘못 찾았나 싶어 주변을 다시 살펴보고 위로 올라가 보아도 별다른 길은 보이지 않았다. 자연 그대로의 험준한 상태를 그대로 보존해 둔 듯했다. 가파른 흙비탈을 조심스럽게 로프와 나무뿌리를 잡으며 힘겹게 내려갔다. 내려오긴 했지만, 해가 지고 난 뒤 이 험한 절벽을 다시 올라갈 일이 은근히 걱정되었다.
하지만 걱정은 나갈 때 하기로 마음먹었다. 어렵사리 이곳까지 다다랐으니, 일단 들어온 이상 사진 작업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밀물 시각이 멀지 않은 듯했다. 점심을 먹었던 마카 베이의 잔잔했던 물결과는 차원이 달랐다. 웅장하고 거친 파도가 성큼성큼 밀려들고 있었다. 물이 더 들어차기 전에 풍경을 담을 욕심으로 해안가 바위 위로 올라갔다.
바위마다 빽빽하게 군집을 이룬 홍합 떼가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발 디딜 틈조차 없을 정도였다. 알록달록한 말미잘들도 바위마다 화려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밀물이 점차 들어오기 시작해 서둘러 바위에서 내려왔다. 반대편 해안의 비경을 담기 위해 가파른 모래 언덕을 다시 올라갔다.
해안가 너머로 기암괴석들이 늘어서서 장엄한 장관을 연출하고 있었다. 송곳처럼 뾰족하게 솟아오른 바위 봉우리(Point of the Arches)의 생김새가 지금까지 보아온 워싱턴의 바다 풍경과는 사뭇 달랐다. 지금까지 마주했던 워싱턴의 바다가 부드럽고 서정적인 느낌이었다면, 이곳 쉬쉬 비치는 강렬하고 거칠었다. 원초적인 자연의 묘한 힘과 위엄이 온몸으로 전해져 왔다. 회원들 모두 넋을 잃고 셔터를 누르느라 여념이 없었다.
해가 지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조금 남아 있었다. 해안 아래쪽까지 내려갔다 오기에는 시간이 다소 빠듯할 것 같아, 따스한 모래밭에 털썩 몸을 누였다. 아직은 쌀쌀한 2 월의 날씨였지만, 하늘에서 쏟아지는 햇살만큼은 따스하고 포근했다. '이대로 시간이 잠시 멈추어 주었으면' 하는 부질없는 생각마저 들 만큼 평화로운 순간이었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해가 수평선 너머로 낮게 떨어졌다. 바닷물도 해안 가까이 수북이 들어차 있었다. 구름 한 점 없는 화창한 하늘이라 사진가로서 기대하는 붉은 노을의 입체감은 다소 아쉬운 날이었다. '사진은 기다림의 예술'이라 했건만 자연이 준 조건 안에서 최선을 다해 프레임을 구성해 본다. 일몰을 가장 아름답게 담을 수 있는 구도를 찾아 이리저리 발걸음을 옮기는 사이, 마침내 붉은 해가 수평선 너머로 넘어갔다.
이제 돌아갈 일이 까마득한 과제로 남았다. 밝은 낮에도 걸어오기 힘든 진흙길이었다. 낙조의 여운을 한가롭게 즐길 겨를이 없었다. 서둘러 장비를 정돈하고 철수 채비를 마쳤다. 가파른 절벽 길을 다시 힘겹게 올랐다. 아직은 숲속에 여명의 잔광이 아주 조금 남아있어 다행이었다. 질퍽거리는 진흙탕을 요리조리 피하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어느덧 숲은 완벽한 어둠 속에 갇혔다. 회원 모두가 준비해 온 헤드랜턴과 손전등을 켜고 앞사람의 발자국을 따라 묵묵히 걸었다. 걷기에는 고단하고 힘든 길이었지만, 어둠 속을 함께 걷는 색다른 운치가 있었다. 오직 조명 불빛이 비추는 앞사람의 발끝만 보고 걸어가니 오히려 거리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장난스레 귀신 이야기도 나누고 이런저런 소소한 담소를 주고받으며 걸어가다 보니, 진흙탕에 발이 푹푹 빠지는 것조차 그리 불쾌하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 나오니 마침내 환한 주차장에 다다랐다. 들어올 때 서 있던 다른 차들은 이미 모두 떠나고, 오직 우리 차만 덩그러니 남아 우리를 맞이해 주었다. 밤하늘을 올려다보니 은하수처럼 수많은 별이 빽빽하게 수놓아져 있었다. 달빛이 유난히 밝아 별이 아주 많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밤하늘을 가득 채운 별빛은 지친 우리를 따뜻하게 밝혀주기에 충분했다.
혼자였다면 엄두조차 내지 못했을 험한 길이었다. 함께 해준 동료 회원들이 있었기에 다다를 수 있었던 길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함께해 준 회원들이 한층 더 고맙고 정겹게 다가왔다. 차 헤드라이트를 불빛 삼아 켜고 늦은 저녁 식사를 준비했다. 밤하늘 아래 차가운 길바닥에 앉아 나눠 먹는 식사는, 직접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감히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굴지의 진수성찬이었고 평생 잊지 못할 맛이었다.
자, 이제 다시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타코마까지는 다시 4 시간 30 분을 달려가야 한다. 집에 도착하면 날이 밝아오는 내일이 되겠지만, 6 년 동안 품어왔던 쉬쉬 비치의 웅장한 진면목을 가슴에 담고 돌아간다는 뿌듯함 덕분에 피곤함조차 기분 좋게 잊힌다. 여행의 끝은 늘 다음 여정을 기분 좋게 준비하는 시작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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