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릿 호수를 메운 고사목과 윈디 리지의 찬 바람: 마운트 세인트헬렌스 동쪽 길 산행기
최종 수정일: 8월 9일
1980년 5월 18일, 마운트 세인트헬렌스(Mt. St. Helens) 화산이 폭발했다. 공교롭게도 우리나라의 5·18 민주화운동과 동시에 터진 화산이라 우리 교민들에게는 더욱 인상 깊게 각인된 산이다.
우리가 사는 타코마(Tacoma)에서 남쪽으로 약 80 mile 거리에 위치한 산인데, 폭발 당시 타코마까지 화산재 피해를 입었을 정도로 대규모 폭발이었다고 한다. 미국 정부는 이곳을 살아있는 자연 교육 현장으로 조성하여 매년 수많은 방문객을 맞이하고 있다. 몇 년 전에도 화산 활동이 다시 왕성해지면서 '또 한 번 폭발하지 않을까' 싶을 만큼 여전히 숨을 쉬고 있는 활화산이다.
내가 이곳을 처음 방문했던 때는 한국에서 관광차 미국을 찾았던 1992년이었다. 그때만 해도 화산 폭발이 일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라, 지금보다 당시의 참혹했던 상황을 훨씬 가깝게 느낄 수 있었다. '화산'이라는 단어 자체를 교과서나 책으로만 접했던 처지라, 눈앞에서 직접 화산 폭발의 흔적을 바라본다는 사실이 마냥 신기하기만 했다. 오늘은 이 특별한 산을 사진 모임 회원들과 함께 다시 찾아가 보기로 했다.
그동안 수차례 방문했던 산이지만, 늘 '수박 겉핥기식'으로 잠깐 둘러보고 내려오는 게 전부였다. 그러다 보니 처음 방문했을 때 느꼈던 가슴 깊은 감동을 좀처럼 다시 경험할 수 없었다. 그 이유가 늘 궁금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세인트헬렌스로 들어가는 길은 크게 세 곳이었다.
가장 흔히 방문하는 코스는 서쪽 입구다. I-5 고속도로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가다 Exit 49로 나와 504번 도로로 접어드는 방법이다. 이곳에는 대형 방문객 센터(Visitor Center)가 조성되어 있어 폭발 당시의 상황과 기록 자료를 체계적으로 보여준다. 다만 오랜 세월이 흐르며 주변 풍경이 자연스럽게 복원된 탓에, 당시의 처참했던 상황을 직관적으로 상상하기엔 다소 무리가 있다. 하지만 접근성이 가장 쉽고 편리해서 대부분의 방문객이 이 서쪽 코스를 이용한다.
두 번째 입구는 남쪽 코스로, Exit 21로 나가 503번 도로를 타고 들어가는 길이다.
마지막 세 번째 입구는 바로 동쪽 코스다. 타코마에서 출발할 경우 7번 도로를 타다가 12번 도로로 접어든 뒤 25번 도로로 빠져나가는 방법이다. 쉽게 말해 마운트 레이니어 파라다이스 방향으로 가다가 중간에 25번 도로로 꺾어 들어가는 코스다. 내가 1992년 처음 세인트헬렌스를 찾았을 때 갔던 길이 바로 이 동쪽 입구였다.
당시 동쪽 코스에서 바라본 세인트헬렌스의 위용은 나에게 엄청난 충격과 감동을 안겨주었다. 비록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세세히 둘러보진 못했지만, 잠깐 사이에 온몸으로 느낀 웅장한 분위기에 압도되어 이민을 온 후로도 늘 다시 한번 가보고 싶다는 열망을 품어왔다.
그래서 이번 출사는 자주 가던 서쪽 길이 아닌, 늘 그리워했던 동쪽 입구로 방향을 잡았다. 겨울철에는 쌓인 눈으로 도로가 통제되지만 여름철에는 항상 열리는 길이다. 사실 그동안 몇 번이나 재방문을 시도했었다. 그러나 해동기만 되면 해빙수로 인한 대형 산사태가 발생해 진입로의 다리가 유실되는 바람에 매번 발길을 돌려야 했다.
다행히 이번에는 길이 활짝 열려 있었다. 다리 입구에 다다르니 그동안 일어났던 산사태의 위력이 짐작 가고도 남을 만큼 어마어마했다. 쓰러진 아름드리나무들과 무너져 내린 흙더미가 당시의 가공할 상황을 말해주는 듯했다. 다리는 가교(임시 다리) 형태로 설치되어 있었다. 정식으로 교량을 건설해도 매년 산사태로 유실되다 보니 임시 가교로 유지하는 듯했다.
가교를 지나 한참을 올라갔다. 폭발 후 3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지금도 산자락 곳곳에는 당시의 아픔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새롭게 솟아오른 푸른 나무들 사이사이로, 당시 화산 열기에 검게 타버린 고사목들이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사진을 담는 이들에게는 더없이 인상적인 피사체이지만, 한편으로는 당시의 비극이 가슴으로 전해져 오는 묵직한 풍경이었다.
올라가는 길목마다 멋진 전경을 품은 조망 포인트(View Point)들이 나타났지만, 우리는 쉬지 않고 이곳의 하이라이트이자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윈디 리지(Windy Ridge)'까지 곧바로 올라갔다.
드넓은 주차장에 차를 세우니, 이름 그대로 시원하고 강렬한 바람이 사방에서 불어왔다. 올여름은 유난히 더운 날이 많아 그동안 산을 다닐 때마다 모기 때문에 애를 먹었던 터라 이번엔 만반의 준비를 하고 왔다. 하지만 강하게 불어오는 바람 덕분인지, 아니면 수그러든 날씨 덕분인지 모기 한 마리 날아들지 않았다. 파란 하늘 위로 둥실둥실 떠 있는 흰 구름 풍경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한 편의 예술작품이었다.
주차장을 기준으로 왼쪽으로는 세인트헬렌스의 당당한 위용이 펼쳐져 있고, 오른쪽으로는 가파른 언덕 위로 하늘 끝까지 이어질 듯 수많은 계단이 조성되어 있었다. 세인트헬렌스 산의 높이는 8,336ft 이며, 우리가 서 있는 윈디 리지는 그보다 조금 낮은 고도에 위치해 있다. 산 정상의 눈은 이미 다 녹아 없었지만, 분화구 주변으로 밀려든 하얀 구름 띠가 마치 분화구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듯한 장관을 연출하고 있었다.
우리는 신발 끈을 단단히 묶고 계단을 오를 채비를 마쳤다. 화창한 날씨 덕분인지 많은 방문객이 계단을 오르내리고 있었다. 참고로 세인트헬렌스산은 지정된 탐방로(Trail) 외의 구역을 발로 밟는 것이 엄격히 금지되어 있다. 코스를 벗어날 경우 100 달러의 벌금이 부과된다. 자연의 자생력을 높이고 생태계를 보호하기 위한 조치이지만, 다양한 구도를 찾아 촬영해야 하는 사진가의 입장에서는 다소 아쉬운 제약이기도 했다. 그래도 자연을 지키기 위한 규칙이기에 정해진 코스를 철저히 준수하기로 마음먹었다.
정확히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수없이 길게 이어진 계단을 차근차근 밟고 올라갔다. 자갈과 돌훍으로 이루어진 가파른 언덕이라 계단이 없었다면 오르기 매우 힘든 지형이었을 텐데, 잘 조성된 계단 덕분에 수월하게 정상에 다다를 수 있었다.
정상에 올라서자 사방으로 탁 트인 전경이 가슴속까지 시원하게 뚫어주었다. 맑고 청명한 날씨 덕분에 주변에 병풍처럼 둘러선 유명한 명산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가장 먼저 마운트 레이니어의 웅장한 봉우리가 선명하게 눈에 띄었고, 그 옆으로는 마운트 아담스의 정상, 그리고 멀리 오레곤주의 마운트 후드까지 아련하게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발아래로는 세인트헬렌스의 아득한 계곡과 이름 모를 폭포가 신비롭게 내다보였다. 멀리서 보아도 압도적인 위용을 자랑하는 그 폭포는 마치 영화 속 신선들이 바둑을 두고 있을 것만 같은 분위기로 우리를 유혹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폭포까지 이어지는 트레일 코스가 있다고 한다. 왕복 7 mile 에 달하는 코스라 결코 만만치 않겠지만,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꼭 도전해 보고 싶은 탐방로다.
전망대 정상에서는 서쪽 입구에 위치한 방문객 센터가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보였고, 우측으로는 '스피릿 호수(Spirit Lake)'가 수많은 고사목을 안은 채 펼쳐져 있었다. 꽤 넓은 호수의 1/5 가량이 하얗게 바랜 고사목들로 메워져 있었다. 강한 바람의 영향인지 나무들이 모두 동쪽 호숫가로 밀려와 빈틈없이 빼곡하게 차 있었다. 당시 화산 폭발이 얼마나 참혹하고 굉장했는지 실감할 수 있는 광경이었다.
언덕을 따라 좁은 오솔길이 아늑하게 이어진다. 길가에 활짝 핀 야생화들이 환한 미소로 우리를 반겨주는 듯했다. 곳곳에 저마다의 모습으로 누워있는 고사목들은 거친 아픔의 상처를 안고 있으면서도, 사진가들에게 멋진 포즈를 취해주며 특유의 서정적인 멋을 자아내었다. 오솔길을 따라 조금 더 걸어가니 호수 아래쪽 풍경이 한층 더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어느 정도 거닐다 풍광이 비슷해져 다시 발길을 돌려 내려왔다.
다음 목적지인 스피릿 호수를 보다 가까이서 담기 위해 채비를 마친 뒤 차를 타고 내려갔다. 얼마쯤 내려가다 나타난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위에서 내려다보았을 때는 그리 멀어 보이지 않는 길이었다. 카메라 가방을 둘러메고 호수로 이어지는 작은 오솔길을 따라 걸어 내려갔다.
길이 무난하여 내려가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올라오는 사람들과 간간이 마주쳤는데, 이상하게도 다들 얼굴에 웃음기가 하나도 없었다. '날씨가 더워서 그런가 보다' 하고 무심히 지나쳐 내려가니 마침내 산길이 끝나고 호수로 연결된 드넓은 평지가 나타났다.
평지를 걸으며 주변을 둘러보니, 화산의 상흔인 고사목과 새로이 자라난 푸른 나무들이 한데 어우러져 강인한 생명력의 산을 이루고 있었다. 자연의 위대한 치유력에 새삼 탄성을 지르며 호수 바로 앞까지 다가섰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너무나 어마어마하여 프레임 속에 어떻게 정돈해 담아야 할지 막막할 정도였다. 아래서 바라본 호수는 호수 전체가 고사목으로 메워져 있는 듯했다. 수많은 나무가 어찌나 빼곡하게 차 있는지, 나무 위를 그대로 걸어가거나 뛰어다녀도 밑으로 빠지지 않을 것만 같았다.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썩지 않고 회색을 넘어 흰색에 가깝게 하얗게 바랜 고사목들이 저마다의 기품을 뽐내고 있었다. 한동안 넋을 놓고 바라보다가 이 거대한 자연의 순간을 정성껏 카메라에 담았다. 풍경이란 한두 번 마주하는 것만으로는 자신이 원하는 깊이를 온전히 표현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아쉬움이 남는 만큼 '다음엔 더 깊이 담아낼 수 있겠지' 하는 위안을 삼으며 다시 올라갈 채비를 했다.
평지를 지나 언덕 오르막길로 접어드는 순간, 비로소 난관이 시작되었다. 웬만한 산길은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도 있고 평지도 나와 숨을 고를 여유가 있기 마련인데, 이곳은 짧은 구간임에도 오로지 가파른 오르막만 계속 이어졌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무거운 카메라 가방을 짊어지고 원수 같은 삼각대까지 든 채 오르는 길은 그야말로 고통 자체였다. 아까 내려올 때 마주쳤던 사람들의 얼굴에 왜 웃음기가 하나도 없었는지 그제야 뼈저리게 이해가 가는 순간이었다.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겨우 30분 남짓한 거리를 이토록 힘들게 올라와 보긴 처음이었다. 주차장에 도착해 가방을 내려놓고 참았던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때마침 불어온 상쾌한 산바람이 땀방울을 시원하게 씻어주었다.
다소 고되고 무리한 일정이었지만, 그토록 열망했던 세인트헬렌스의 웅장한 진면목을 카메라에 담아냈다는 사실에 가슴 깊이 뿌듯함이 차올랐다. 20여 년전 처음 만났던 그날의 감동과 설렘이 다시금 살아난 참으로 값진 출사길이었다.
















댓글